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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01_next.gif장선희 소설가 문학서재

ㆍ작성자 장선희
ㆍ작성일 2018-03-19 16:49
ㆍIP: 125.xxx.136
수필/혜화동 목욕탕 가는 길

혜화동 목욕탕 가는 길/ 장선희


오늘은 늦은 겨울의 일요일이다. 가족들은 부족한 잠을 채우느라 9시가 넘어도 아직 이불 속이다. 나는 목욕탕을 가기 위해 10시쯤 성북동 집에서 도보로 출발했다.
포근하게 체감되는 겨울 날씨가 움츠린 가슴을 저절로 펴지게 한다. 홀로 터덕거리는 발걸음은 어느덧‘성북동 갤러리’의 건물 앞에 멈췄다. 예전에 ‘십자가 그림전시회’로 내부에 방문했던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림으로 나타내는 십자가의 표징은 여러 모양으로 상상하는 의미를 부여했다. 마치 자신이 십자가를 그렇게 느껴지는 것처럼 반성하게도 만드는 시간이었었다. 나는 사진작가의 발상에 도취하여 갈 길을 잃은 채 감상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문득 바라보니 타일 벽에 비치는 여인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목욕탕 가는 민낯인 내 모습을 잊은 채 기웃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여인을 보는 순간 주위를 살피며 50m쯤이나 그대로 달려 나갔다. 아무도 안 보았다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웃음도 나온다.
골목 비탈길을 조금 올라가면 ‘혜화문’이라는 도성이 있고 담장 옆으로 정자가 있는 아담한 공원이 보인다. 지난날 햇볕이 따스한 날 앉았던 벤치가 나에게 온기를 전달해줄 것 같아 슬며시 앉아보았다.
겨울바람이 시샘하듯 앉아있는 동안 어느새 내 뺨을 꽁꽁 얼게 만들고 오늘은 그냥 지난날의 따스함만 마음으로 담는다.
공원을 지나 좌측으로 대로변 건너엔 혜화동 대성당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나를 품어주는 것 같아 마음이 평온해진다. 옆으로 보면 혜화로터리를 끼고 횡단보도를 건너면 우측에 ‘24시 불가마’라는 목욕탕이 보인다.
현시대에 맞춰 간판만 바뀐 아담한 내부 시설은 언제나 한산한 인원수로 맞이해주니 나에겐 더 정겹다. 탕 안에는 양쪽으로 다섯 명씩 앉을 수 있고 비어있는 서너 개의 자리가 항상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더욱 맘에 든다.
물론 주인 입장에선 손님이 많아야 좋겠지만 마치 가족을 기다려주는 듯 넉넉함으로 생각되어 내가 단골로 찾아가는 이유이다.
목욕을 끝내면 탕 안에서의 열기를 전신에 담은 채 가끔 씨지 브이 영화관에 들르는 것도 습관처럼 되었다. 이번엔 마음에 드는 영화를 두 편이나 골라 줄거리를 훑어보며 당장 영화 감상에 빠지고 싶지만 오늘은 포기해야겠다.
좋은 영화를 감상하려면 민낯인 내 모습이 방해될 것 같고 왠지 다른 이들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다음 기회로 미루면서 그 곳을 나오니 마주보이는 액세서리 가게가 보인다.
패딩잠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자동문을 누르니 이미테이션 보석들로 갑자기 눈앞이 환하게 비추어진다. 눈부시게 하는 여러 모양들은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나온다. 그런데 손을 꼭 잡고 들어오는 커플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방금 내 손에서 홀대받던 리본머리띠가 풍성한 갈색 머리칼에서 제 주인을 만난 듯 반짝거린다. 나는 아직도 축축하게 헝클어진 머리와 초라한 내 모습에 부끄러워진 손은 슬며시 그대로 자동문을 눌렀다.
누구든 이런 내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생각에 내심 만족하며 지금 이순간은 모든 사람과 무관한 나 혼자만의 세상인 것 같다. 다음엔 예쁘게 치장한 모습으로 영화도 보고 좋아하는 액세서리도 마음껏 골라봐야겠다.
혜화동에서 성북동까지 오가는 길엔 소극장들이 많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제일 마음에 든다. 소극장 입구에 재미있는 현수막이나 간판들의 연극 제목들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나는 영화나 연극, 뮤지컬 등이 그냥 간판만 보아도 즐거워진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음껏 문화를 직접 볼 수 있는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몸과 마음이 편안해져서 돌아오는 길에 함박눈이 내 얼굴을 간지럽게 했다. 오늘은 몸과 마음이 호강하는 알찬 하루였기에 집으로 가는 길이 더욱 가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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