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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주 김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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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강좌 수필가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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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자 |
김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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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일 |
2017-02-13 1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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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동 가는 길
어릴 적 아홉 살인가 열 살쯤. 경찰 공무원이셨던 친정 고모부님께서 순천에 근무하시다가, 상사 지서장으로 발령받아 이사하시게 되었다. 고모네 집과 우리 집은 친척 중에 제일 가까운 곳에 살다 보니 사촌들과도 친형제처럼 사이가 좋았었고, 동갑내기도 있어서 자주 만났다. 그러다가 주말이나 방학이면 두 집을 오고 가면서 몇 밤씩 머물다 오곤 했었는데, 이젠 날마다 볼 수 없다는 게 섭섭하고 아쉬움이 컸지만, 방학 때 꼭 놀러 오겠다.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렇게 고모부님을 따라 발령지로 이사 가시게 된 고모님은,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순천에 오셨다가 우리 집에 들르시곤 하셨다. 닷새마다 한 번씩 열리는 장은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아래 지역에서 제법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인근 군지역 사람들은 장날이 되면, 새벽밥을 먹고 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걸어서 먼 길을 돌고 돌아 사람들과 갖가지 용품들로 북적거리는 장으로 모여든다.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그 날도 고모님은 이것저것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서 집으로 오셨다. 늦은 점심을 드시고, 가시는 길에 나를 데려가고 싶어 하셨다. 매일같이 만나서 놀다가 한참을 떨어져 있었으니, 보고 싶기도 했던 사촌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마음이 들떠서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나섰다. 그렇게 닷새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보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장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긴 고모님께서는 나를 데려다줄 수가 없게 되셨다. 이웃 사람들 장에 가는 길에 나를 용수동까지만 데려다주라고 부탁하신다. 어머니한테 마중 나오시라고 연락을 보냈으니 그 사람들만 따라가면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라고 하셨다. 연락을 잘 받으셨을까, 만약에 엄마를 못 만나면 어떻게 할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막연한 두려움이 앞섰지만, 마을 사람들을 따라갈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올 때는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순천으로 돌아가는 길은 십 리가 더 되는 산을 걸어서 넘어가야 했다. 새벽밥을 먹고 아침 일찍 출발해도 오전 나절이 다 돼서 도착하게 된다. 걱정과 불안한 마음으로 마을 사람들을 따라 길을 나서긴 했지만, 그다지 험한 산길이 아니어서 졸래졸래 따라가기 힘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길목 여기저기 피어있는 예쁜 꽃들이 불안한 마음을 잊어버리게 했으니 마냥 신나고 좋았다. 이른 아침이라 해도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에 땀방울이 온몸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데, 꽃을 보는 재미에 정신이 팔려 더운 줄도 모른 채, 그렇게 어디만큼 갔을까, 갑자기 조용해서 돌아보니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혼자 신나서 꽃이 피어있는 길 안쪽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그만 마을 사람들을 놓쳐버렸다.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겁이 많고 두려움이 심한 나는 놀라서 허둥지둥 사방을 찾아봐도 사람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도 자기들 이야기에 빠져서, 줄곧 따라오겠거니 생각하고 그냥 산을 넘어가셨던 거다. 잔뜩 겁이 나서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되돌아가지도 못하고 웅크리고 앉아서 얼마나 울고 있었을까, 다른 마을 사람들이 장에 가려고 산을 넘어오다가 나를 발견하셨다. 한눈에 길 잃은 줄 알아차리고 순천 가는 길이면 같이 가자고 하신다. 어찌나 반가웠는지 행여나 놓칠세라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뒤쫓아갔다.
순천으로 가는 길은 외길이었지만, 제대로 잘 찾아가는지 여전히 불안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산길을 타고 오르고 내리기를 몇 번 하다 보니 어느새 상사와 순천의 경계지역인 용수동 마을에 다다른다. 거기에서 집까지는 거리가 멀었어도, 순천에 왔다는 그것만으로도 조금 편안해졌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동네가 나오겠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서 걸음을 막 재촉하는데 아, 낯익은 얼굴, 멀리서 봬도 한눈에 그냥 알아볼 수 있는 얼굴, 어머니셨다. 어머니가 거기서 기다리고 계셨다. 앞에 도착한 일행 중에 있어야 할 딸이 보이지 않았으니 속이 타는 얼굴로 이제나저제나 산을 넘어오는 사람마다 살피시다가,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딸을 발견하시곤 반가움에 화들짝 달려오셨다. 그 순간 참았던 설움이 터져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통곡하듯이 울었다. 그렇게 울고도 진정을 못 하고 집에 오는 내내 울었다. 더위를 먹었는지 밤에는 열이 나고 며칠 동안 몸살로 아프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처음 느낀 두려움이다 보니 몇 해가 지나도록 잊을만하면 한 번씩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에 용수동의 기억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2016년 11월1일, 89세를 마감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그다지 큰 고통 없이 편안하게 가신 듯해서 정말 감사한 마음이었다. 장지는 생전에 유언하신 대로 화장을 하고, 40여 년 전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를 광양에서 모셔와 함께 납골당으로 모시기로 했는데, 지역이 다른 곳에서 같은 지역으로 모시기엔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다. 가족들과 다시 의논 끝에 차라리 공원묘지에 평장을 하기로 결정하고, 출상하는 날 아버지를 모셔와 두 분을 한자리에 나란히 모실 수 있었다. 그곳이 바로 용수동 공원묘지였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산을 타고 넓게 자리한 공원묘지가 깔끔하게 단장 돼 있었다. 그 날은 경황이 없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일주일쯤 지나 다시 부모님 산소를 가려고 마을을 지나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돌아가는데, 문득 떠오르는 추억 하나에 생각이 멈춘다. 지금은 도로가 넓게 포장되고 교회와 집들이 생기고, 길목도 많이 변해서 전혀 모르는 길이 돼 있었지만, 그 옛날 어머니를 만나 목이 쉬도록 서럽게 울었던 용수동 그 길목 어디께일까, 50년이 지나는 동안 잊고 살았던 빛바랜 기억들과, 먼 길 떠나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먹먹하고 울컥해진 마음을 한참 동안 진정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을 모셔놓은 산소 주변은, 야트막한 산 새에 온종일 햇살이 내린다. 멀지 않은 곳 모퉁이에 큰 도랑을 타고 산에서 내려오는 물소리가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주고, 특히 숲에서 지저귀는 갖가지 새소리와 색색이 물든 11월의 단풍은 또 얼마나 고운지, 이곳 산길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는지 새삼 알게 됐다. 용수동은 부모님께서 영면에 드신 곳, 언제라도 가면 반갑게 기다려 주시는 곳, 어린 날 두려움에 떨며 울었던 그곳이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됐다. 50년이 지난 지금 용수동 가는 길은 예전과 판이해졌지만, 당신 닮은 분신 하나를 또 기약 없이 기다림하고 계실 고갯길에 오늘은 웃으면서 어머니를 마중하러 간다.
2017 0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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