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종 덕

봄은 아름답다. 여름은 덥다. 겨울은 차갑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가을은 어떻다고 말하기기 어렵다. 그것은 가을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그 가짓수가 너무 많아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사계절은 싫어하는 것은 아닌데도 가을은 마음에 생채기를 내면서까지도 나의 가슴에 수를 놓는다.

창가로 스며드는 바람이 잠을 깨워도 그렇게 짜증 나거나 이불을 푹 덮어쓰고 더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 그래 나를 찾아왔구나 하는 반가운 마음. 툴툴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 맞아야지 하는 선한 생각이 든다.

햇살이 찾아 들 즘의 하늘은 매서운 칼날로 상처를 입은 마음을 마치 용접이라도 하듯이 이어 붙여 준다. 그때 함께 오는 애교 많은 바람은 곁을 떠날 줄 모른다. 아마도 강아지가 꼬리치며 달려드는 것보다 더 반갑게 둘러댄다. 아 어쩜 이런 것은 느끼지도 못하고 숱한 세월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때, 지금이라도 이러한 고운 벗들과 지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일단 성공한 삶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햇살이 등을 밀어 주어 오르막길에도 가뿐히 넘어갈 수 있는 것은 햇살 중에 나를 좋아하는 파장이 스며들어 에너지를 품어 내개 때문일 것이다. 살아오면서 타인의 도움을 받은 것을 생각해보면 이처럼 곱게도 스며드는 빛같이 내가 알아볼 수도 없게 들어와 앉아 있었을 것이다. 참 고운 빛이 그리도 고맙다.

아직 잠을 깨지 않은 들풀들 곁으로 나의 숨소리가 박자를 타고 흐를 때, 꼭 갓난아이가 맑고도 깨끗한 눈을 뜨고 웃어 주는 그 미소 같은 살결들이 눈을 뜨며 한층 곱게 맞아 준다. 이 세상이 그렇게 어려울 지라도 주위에 있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조금은 덜 외로울 것 같다.

논길 기로 피어 있는 코스모스도 웅크리고 있는 나의 마음을 읽었기나 하듯이 햇살에 빛나는 노란 꽃술은 더없이 정겹기만 하다. 이런 가을 길을 달려가면서 머리에 솟아나는 온갖 잡념이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 속에 빠져들어 머릿속은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아스피린으로는 느끼지 못할 희열로 다가온다.

이 가을을 다스리는 것은 꼭 신은 아니더라도 농부의 손끝인 것 같다. 이런 아침에 들녘에 나오는 것은 신의 섭리를 거역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러한 겸손으로 예를 다하기 위함일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아는 한 대상에 대하여 예를 다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대상에 많은 은혜를 입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예는 오래가질 못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일반적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저 농부는 그 예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상황이 자신에게 아주 불리하게 전개되더라도 원망보다는 기다림으로 이어왔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가을은 얼마나 큰 감동으로 다가오겠는가. 나도 몇 번쯤은 농부의 시절이 있었다. 거의 지나가는 농부였지만, 그렇지, 새끼 농부였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그땐 다른 것은 다 몰라도 힘들었다는 생각이 꽉 차있다. 그러니 농부와 같은 감동은 가질 수 있었겠는가.

가을 속을 달려가는 이 길에서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일들이 지금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건네주고 있다. 내가 농부를 배운다면 가을에는 결실을 맺을 것이라는 것도 배웠어야 했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열매를 찾아서 얼마나 헤매며 살아왔던가를 되돌아보면 그 답은 모두 가을 속에 있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느끼고 있다.

그래서 가을은 그냥 오지 않는다는 것도 배워야 했고, 가을을 가지려면 자신의 일에 예를 다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가을은 너무도 맑게 다가온다. 무거움도 없이 그냥 예쁜 미소로 찾아든다.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가을의 냄새에 젖어 보면서 또한 갈바람과 대화를 해보는 것도 헉헉거리며 달리고 있는 나의 길에 맑은 숨을 짓게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