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종 덕

살아갈 때 기다림의 이유가 바램이고, 그 보다 절실한 것을 희망이라 한다면, 이들이 서로 하나씩 다가오면 너무나도 좋겠다. 어떨 땐 바라지도 않는 일들이 일어나 숨어 있는 나를 그렇게 기쁘게 만들기도 하고, 아주 절망스러운 일들로 바꾸어 주기도 한다. 그래서 바램은 그렇게 크게 잡을 수는 없는 것 같다. 봄이 올 때는 거저 쉽게 오지는 않는 듯하다. 내가 어여쁘고도 그렇게 마음에 드는 사람이 갑자가 나의 곁을 지나갈 때는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없던 친밀감이 생기나기도 해서 곁에 다가가서 말이라도 붙여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기다리던 사람도 아니고, 성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나에게 저러한 감정이 솟는다는 것은 그 대상을 정해두고 만나기를 기다리며, 오늘은 볼 수 있을까하는 희망하고는 다른 것 같다.

봄도 누군가 닳아 쓰-윽 내 곁을 지나가는 사람 같다. 다가가서 나를 아느냐고 장난스레 물어보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봄은 언젠가는 틀림없이 오는 것인데 이렇게 대상을 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온다는 바램 보다는 기어코 오고야 말 것이라는 거대한 희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봄에 대하여 붙들고 늘어질 만큼 크게 기대하는 것도 있는 것은 아닌데, 그냥 매일 보던 사람처럼 대해도 될 것 같은, 정이 든 대상 같기도 한데, 그렇게 쉽게 대하지 못하는 것은 봄에 기대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년에는 아무런 아픔 없이 다가와 줘서, 왜 이렇게 안 올까하며, 길가의 매화에 어디쯤 오고있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먼산 꼭대기에 쌓여 있는 잔설을 보면서, 빨리 녹아야 올텐데 하며 조바심으로 기다렸었다. 이윽고, 시냇가 수양버들에 고운 눈이 트고, 벚꽃의 잔사가 시냇가에 윤슬처럼 떠갈 때 어느 듯 봄의 어깨에 기대고 감정에 겨운 눈가엔 미소가 번지곤 했다.

올해의 봄은 정말 아프게도, 어느 듯 마음을 때리면서 오고 있다. 이것은 나의 긴 바램이었는데, 작년처럼 내 곁에 미소를 보내지 못하고, 꽃샘추위에 꽁꽁 얼어 왔다. 그 슬픔이 나의 깊은 속에도 둥지를 틀어 그 이쁜 매화의 웃음도, 가녀리게 귀 간질이 던 속삭임도 아파서 열이 나는, 입에서 단내가 나는 아픔으로 왔다. 항상 나에게 빚만 지게 했던 봄이 빚 갚을 여력도 없는 나에게 기대어 슬픈 눈물을 흘리고 있다.

겨울에 억눌려 숨도 못 쉬고 지내왔을 봄이, 반겨 줄 대상없는 이 자리에 아무런 바램도 없이 왔다. 봄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을 보면 분명 처음 접하는 병일 것 같다. 이렇게 휘몰아치는 역풍(疫風) 속에서 사람사이로 가깝게 다가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왔다고 인사하는 모습이 그렇게 애닯아 보인다.

사람들은 봄에게 잘 해준 것도 없으면서, 스스로의 아집으로, 깊게 패인 마음으로, 상처로 서로를 미워하고 있어 아직 봄이 왔는지도 모르고, 서로 배고픈 호랑이처럼, 사자처럼, 서로 잡아먹을 태세다. 이런 인간사를 보았으면 비켜 갈 수도 있을 텐데, 작년에 온 제비처럼, 반겨주는 주인집을 그냥 인사 없이 지나가기에는 마음이 저린 모양이다. 사람이었다면 보기 싫은 곳은 냅다 뛰어가거나, 뒷발길로 훽 돌아서 갔을 것이다.

봄은 사람을 버리고 돌아설 만큼의 속이 비어 있지는 않나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연히 오겠지하고 생각하는 것이고, 봄은 어떤 아픔이 있나를 챙겨보고 가는 우리의 엄마와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바램이나 희망보다는 더불어 엉켜서 옹아리도 해보고 싶고, 기대어 간지러운 곳도 긁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봄은 아픈 우리의 마음을 그냥 두고 가지는 않을 것 같다. 엄마의 눈물로 얼굴을 부비면 아픈 아기가 미소를 지으며 엄마의 고운 얼굴을 쳐다보듯이, 이 봄도 우리의 아픔에 찐한 눈물로써 우리의 아픔을 만져주고 갈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온다는 말보다는 바램을 넘어선 희망으로, 우리 곁에 반갑게 또 올 수 있기를 고대하며 기다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