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선물>

                                                                             -기행수필-

   대학생활의 마지막 여름방학을 맞았다. 긴 장마는 기말시험을 끝낸 후 여행하기로 한 계획에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날짜는 벌써 7월을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했고 마음만 들뜬 채 정처 없는 구름처럼 둥둥거리고 있었다. 여행에는 날씨가 큰 관건 중에 하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장마는 더 이상 내 발목을 잡지 못했다.

  2016년 7월 6일. 늦은 저녁에 산그늘이 몰고 오는 샛강의 잔물결처럼, 딱딱한 등껍질을 스스로 벗고 훌훌 날아가는 나비의 비행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바람을 가르고 나선다. 떠나자.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평소에 존경하는 철학교수님의 “진정한 자유란 지적 긴장과 그 실천이다.”를 되뇌며 떠나야하는 또 하나의 사유에 충실해지고 싶었다. 그것은 내면으로부터 넘쳐흐르는 깊은 강물이 줄기를 이루고 심연의 그곳에서 고립된 존재의 화티가 갈망의 그림자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고향 울진으로 향했다. 계속 이어지던 장마가 내 설레발에 잠시 주춤거린 듯했다. 잿빛 구름은 잔뜩 심통을 부리는 얼굴이었지만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은 금방이라도 톡 터질 것 같은 봉숭아 씨앗자루처럼 부풀어 올랐다. 북으로 향하는 7번 국도위로 살가운 햇살이 구름 틈을 헤집으며 팔랑팔랑 내려앉았다. 새털처럼 가벼워진 마음은 벌써 고향마을을 날고 있었다.

  포항에 도착하니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차창에 부딪히는 빗줄기는 고향을 그리는 들뜬 열정을 잠시나마 식혀주고 있었다. 버스는 영덕을 지나고 평해를 지나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가 소재하고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숙소를 정한 후 저녁을 먹고 나니 벌써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심술궂은 장마는 학교 운동장에 들어서자 또 한 차례 비를 뿌렸다.

  비릿한 갯냄새가 빗물을 가르며 숨 가쁘게 폐 깊숙이 닿았다. 6년간 드나들던 정든 교문에는 인근 면 소재에 있는 학교 명칭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 옆에 꼬리표처럼 매달린 ‘분교’라는 작은 글자가 오래된 암각화처럼 새겨져 있었다. 학교동네의 꼬불꼬불한 마을길을 한참 걸어 고향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어귀에 있는 육층암(자연석인 바위가 여섯 개의 층을 이루고 있어 마을사람들이 ‘육층암’이라고 부른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과도 같았던 바위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장승처럼 서 있었다. 어릴 적 뛰어놀던 넓디넓은 모래사장은 어디로 갔는지. 바다가 삼켜 버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해변에는 덩치 큰 육중한 콘크리트 벽돌들이 켜켜이 엉킨 채 바다를 묵묵히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세월이 앗아간 추억의 바다가 어둠속에 잠기어 아련하게 다가왔다. 흐린 밤 별빛처럼 성근 집들은 인기척도 없었지만 창틈으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은 나를 환영하기 위한 충분한 축포였다. 기쁨이었다. 간절함이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밤비를 맞으며 어둠에 싸인 고향마을, 철썩이는 파도소리, 추녀 끝에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 골목길에서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은 어릴 적 친구들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오르다 사라졌다. 모든 것이 그리운 밤이었다. 그 밤은 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이었다. 동해바다 해님은 역시 씩씩하고 멋있다. 붉은 휘장을 두른 개선장군처럼 당당하다. 간밤에 흘러내린 눅눅한 향수를 말끔히 씻어버렸다. 한층 가뿐해진 발걸음이 ‘월송정’으로 내딛는다. 월송정은 조선시대 정치가 겸 문장가인 정철의 ‘관동별곡’에서 나오는 관동팔경 중 하나로 잘 알려진 곳이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봄소풍 장소로 거의 지정된 곳이기도 했다. 솔바람이 지켜온 고풍스럽고 의젓한 모습은 옛 그대로였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반가운 탄성이 절로 나왔다. 월송정에서 바라보이는 망망대해와 송림으로 둘러싸인 주위 경관은 비경이다. 당나라 시인 이백은 술 한말에 백편의 시를 짓는다고 하지 않던가. 누각에 걸터앉아 솔향기에 취하면 누구나 시 한 수 정도는 술술 나올 것만 같았다.

  정자에서 나오는 길에 모교인 고등학교에도 들렀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교정에는 자연이 낳아준 연못 ‘녹화정’이 있다. 잉어와 붕어가 유유자적하게 노니는 봄이면 연못가의 창포가 노랑물감으로 그림그리기를 시작했다. 잔디밭에 둘러앉아 시험공부에 지쳐가던 해질 녘이면 달맞이꽃잎이 기적처럼 한잎 두잎 열리고 그 신비함에 놀라 갈래머리 맞대며 숨죽이던 그날들. 여린 풀꽃처럼 꿈을 꾸던 날들이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교정을 나서면서 교문 비석에 새겨진 ‘切磋琢磨’가 떠나야 하는 발걸음에 돌무더기 한 자루 얹어 놓은 듯이 무거웠다.

  버스를 타고 영덕에 내리니 안동행 버스가 두 시간 이후에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영덕시장에 갔다. 상설장이라지만 시골장이라서 절반은 문이 닫혀 있었다. 과일가게에 진열된 자두가 군침이 돌게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한입 베어보니 아주 달아 점심은 자두로 때웠다. 행복한 한 끼였다. 영덕에서 안동으로 향하는 버스는 비지땀을 흘리면서 태백의 능선을 가로질러 고갯마루를 넘어가고 있었다.

  안동 하회마을에서의 민박.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으로 역사마을이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니 몸집이 작고 여윈 할아버지가 우리가 초행임을 눈치 채시고는 민박을 주선해 주신 것이다. 여든이 넘으신 홀로 계신 할머니 댁에서 지샌 하룻밤은 무척 인상 깊었다. 풀벌레들의 교향곡을 들으며 오랜만에 단잠을 이루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마을 둑길을 나섰다. 하회마을을 빙 둘러 싼 강물은 옛 부족국가의 해자(濠)를 연상케 했다. 장마 끝자락의 습한 햇살은 등줄기를 타고내리는 땀방울에 짊어진 배낭의 무게를 더했다. 마을 가까이에 있는 유성룡선생의 병산서원에 잠깐 들러 조선시대 명재상의 우국충정을 담은 <징비록>을 떠올려보며 재촉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다음날,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아름다운 목조건축물로 유명한 영주의 부석사로 향했다. 사찰의 시작인 일주문을 오르며 설레는 가슴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칠월의 녹음은 하늘 도화지에 한 틈의 여백도 허락 할 수 없으리만치 건듯 불어오는 바람따라 물결치며 창창한 바다를 연상케 했다. 사찰은 일렬적인 구조의 모습을 띠고 있었고 가파른 석축은 구도자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했다. 한 계단 두 계단을 오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기회를 가지게 하는 아미타불의 자비로움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계단을 올라 마지막 관문인 '무량수전'이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오자 가슴이 뭉클했다. 화려한 단청대신 세월의 풍화가 지나간 흔적의 단아한 자태는 오랜만에 만난 옛 벗처럼 정겹게 느껴졌다. 동쪽으로 향한 아미타불의 근엄한 눈빛은 복잡한 인생항로와 황폐해가는 의식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깨달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것만 같았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백두대간을 넘어서며 천안으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온 국민의 대대적인 성금으로 한 땀 한 땀 모아 건립된 독립기념관은 민족의 독립 운동사를 한눈에 엿볼 수 있었다. 한 많은 조상들의 은근과 끈기가 이루어 낸 오늘에 숙연해진 마음을 안고 다시 전주행 버스를 탔다.

  전주는 태조의 본향으로 그 선대들이 살았던 곳이다. 어진박물관에는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일월오봉도의 병풍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었다. 일월오봉도를 배경삼아 찍는 사진은 박물관을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또한 경기전 부근에 즐비하게 늘어선 한복대여점도 이색적이었다. 휴일은 아니었지만 곱디고운 형형색색의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경기전 뜰 안을 서성이며 사진촬영으로 분주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조선의 얼룩진 역사와 힘겨운 삶, 그 위에서 찬란한 문화를 이루어 온 조상들의 발자취를 가늠하고나 있을까.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한옥마을의 문화체험을 뒤로하고 순천으로 향했다.

  순천에서는 이틀간이나 지체했다. 송광사와 선암사 그리고 순천만 습지와 국가정원을 둘러보자면 시간적 문제도 있고 체력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순천만 습지의 광활하게 펼쳐지는 갈대들의 행렬은 정말 장관을 이루었다. 후텁지근한 날씨는 불쾌지수를 한껏 뿜어내고 있었지만 끝없이 펼쳐놓은 초록 양탄자의 너울은 수줍은 처녀의 실루엣처럼 상큼했다. 용산전망대에 올라 굽어보는 순천만 갈대밭은 또 한 번 나의 감성을 흔들어 놓았다. 그 풍광이야말로 나의 좁은 지식의 견해로 본 플라톤의 이데아 그 자체였다. 인간이 열망하는 미의 추구는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하나의 ‘테크네’에 불과하다. 모든 예술이 구체적인 현현함을 목적으로 하지 않듯이 규칙적인 틀을 벗어난 자연은 아름다움의 극치다. 그것은 순천만 습지에 대한 나의 편애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저문 해는 먼 산에 내려앉은 운무와 아쉬운 결별을 서두르고 있었다. 곧 찾아드는 어둠도 내일이면 분수처럼 피어나는 새아침의 환호성에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리라. 떠나는 길 위에서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진정한 자유. 그것은 내게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구름이 바람에 떠밀려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구름을 맞으러 달려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