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정리하다 보니 잘 개켜서 넣어 둔 보자기가 여럿 나왔다.
명절이면 오가는 한과나 과일 등을 포장했던 보자기인듯싶은데 아마도 애들이 버리라고 둔
빈 상자에서 아깝다고 벗겨놓은 보자기였을 것이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보자기를 쓸 일 자체가
없다 보니 짐 정리 과정에서 버리기도 그렇고 다시 넣기도 그런 물건으로 여태껏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물건을 담아 둘 수단이 널려 있으나 옛날에는 물건을 수납할 마땅한 방법이 적었다.
더구나 짐을 가지고 다녀야 할 경우 보자기에 싸는 것 외에는 달리 마땅한 방법이 없기도 했다.
원래 유목민은 풀을 찾아 떠도는 생활이라 가사에 필요한 물건이 많지 않아야 하고, 농경 민족은
한자리에 머물다 보니 짐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엉덩이에 있는 퍼런 몽고 반점
으로 보아 우리는 유목민족의 후예답게, 오랜 정착 생활임에도 세간살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장롱 위에 개켜놓은 이불 외에는 횟대라 하여 벽에 매어둔 옷걸이가 전부라 할 만큼 단출한 살림이라
보자기 몇 장이면 크게 불편할 일도 없는 삶을 살아 온 셈이다.
우리가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책가방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혹 부잣집 아이들은 란도셀이라고 하는 일제 가방을 메고 다니기도 했는데, 그런 모습 자체가 아이들
눈에는 생소하게 보여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해 뒤에서 가방을 잡아당기는 등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아이는 보자기(책보)에 책을 싸서 등 뒤에 대각선으로 매고 학교에 다녔다.
필통은 큰 통조림 깡통을 펴서 만든 것으로 아이들이 뛰면 필통에서 연필 부닥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소리 시끄러운 것이야 신경 쓸 일도 아니었지만, 가장 난감한 것은 도시락통에서 새는 김칫국물에
책과 보자기까지 얼룩이 질 만큼 국물이 흘러내린다는 점이다.
집에서는 책을 가지런히 놓고 그 위에 필통과 도시락을 올려 동여맨 책보를 반듯하게 들고 가라는
주의를 늘 받았지만, 등하굣길이 놀이의 연속이니 손이 자유로우려면 책보를 풀러 등에 대각선으로 매는
수밖에 없었고 김칫국물에 엉망이 된 보자기 덕에 심한 꾸지람을 듣는 것도 일상이었다.
도시락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도시락이라는 우리말이 쓰인 지도 그리 오랜 세월이 아니다.
옛날에는 일본 말 -밴또-를 우리말이라고 알고 썼고, 밴또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 일본어가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있기도 했다. 지금은 외식을 위한 식당들이 즐비하나 예전에는 도시락이 아니면
점심을 사 먹을 곳이 마땅히 없었다. 도시락을 싸는 입장에서는 반찬이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김치나 장아찌, 콩자반이나 오징어 체 무침 멸치볶음, 소고기 장조림이나 계란부침, 등이 도시락 반찬의
단골 메뉴인데, 생활이 어려울수록 국물이 질퍽한 김치나 짠 장아찌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소고기 장조림이나 계란부침은 부자들의 호사스러운 반찬으로, 고급 반찬일수록 국물이 샐 일도 없었다.
(그때의 기억 탓인지 지금은 값싼 식품이 계란임에도 -계란은 고급 음식-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다)
밥 외에는 먹을 게 귀하던 시절이라 도시락의 크기도 지금 사람이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컸다.
여기 밥을 가득 담고 한쪽 편에 반찬을 담은 직사각형의 반찬 칸을 눌러서 넣었다.
이러면 반찬 국물이 흘러 밥을 적시고 밖으로 흘러나와 보자기를 적시기도 하는 낭패를 당하는 것인데
보리가 섞인 시커먼 밥에 김칫국물까지 벌겋게 밴 도시락을 펼쳐놓고 먹어야 하는 동심은 점심시간이
결코 기다려지는 시간이 아니었다. (겨울철에는 갈탄 난로에 차곡히 도시락을 쌓아 놓고 데웠다.
완력의 서열에 따라 누룽지가 적당히 익는 도시락도, 온기가 미치지도 못하는 차가운 도시락도 있었다)
보자기 얘기를 하려다 도시락 얘기를 하게 된 것은 아마도 김칫국물에 밴 보자기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외출 시나 여행 시에 물건을 담는 가방의 종류도 많고 호사스러움이 지나칠 정도의 고급 소재에
기가 죽을 정도이다. 또,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택배로 인한 배달용 용기가 쓰레기 장마다 차고
넘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배달이 끝나면 용기나 포장지는 아낌없이 쓰레기로 버려 지지만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귀찮은 쓰레기일 뿐인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으니 보자기인들 귀한 물건으로
대접받을 리 없다. 자투리 헝겊을 모아 한땀 한땀 정성껏 꿰매 만든 조각보의 아름다움도 하나의 궁상쯤
으로 여겨지고 오직 안에 든 물건의 가치만 평가받는 것이 오늘의 가치관이다.
옛 분들이 귀한 물건을 보자기에 싸던 심정에는 복을 간직하려는 정성이 담겨 있다.
보자기를 뜻하는 한자어 복 자는 복(福)의 의미와 동의어로 여겨 귀한 물건을 싸 두면 복이 간직된다고
믿었다고 한다. 혼례용 보 만해도 함보, 기러기보, 사주단자보, 예단보, 폐백보 등으로 가려 쓸 정도로
보자기는 단순히 담는다는 기능에 더해 복을 빌고 간직하려는 염원이 담겨 있었던 셈이다.
궁중에서는 보자기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담을 책까지 있었다고 하니 보자기는 단지 물건을 싸는 용도
만의 존재 이상으로 소중하게 복을 빌던 간절함이 담겨있는 정서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정성을 나타내거나 귀한 물건이라는 표시가 필요한 물건은 곱게 보자기에 싼 물건이 있다.
달렁 상자에 담긴 물건보다는 정성껏 보자기에 싼 물건을 대하면 왠지 정성이 느껴지게 마련이다.
연말연시 즈음하여 사랑하는 이들 간에 선물이 오갈 것이다. 이동 중 발생할 파손에만 신경 쓴 야무진
포장을 뜯으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가위나 칼을 찾으며 단단한 포장에 짜증이 나지 않을지 모르겠다.
자신의 수의(壽衣)를 지어 정성껏 보자기에 싸 보관하던 정서까지는 아니라 해도,
-사랑하는 이에게 복을 보자기에 정성껏 싸 보내는 것도 각박한 세상을 녹이는 온기일지 모른다-
전병일
2019-12-04 14:29
박목철 감사님
보자기와 도시락
책 보자기 대각선으로 책매고 학교가던 시절이 생각 남니다
양은 밴도 시커먼 조개탄 날로위에 대워먹던 밴도 도시락도 먼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보자기는 귀중한 물건을 감쌓을때 필요합니다
각박한 세상 보자기 한아름 전해주는 것도
따뜻한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집필하신 보자기 잘 배람하고 갑니다
한주의 중간 수요일
수수하게 잘풀리는 하루되세요
남은 오후 멋진시간 되세요
감사합니다...
박목철
전병일 작가님, 반갑습니다. 풍요가 넘치는 세상이 오히려 부담스러울 때가 있답니다. 애들은 궁상떨지 말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냥 버리세요! 이게 쉽지 않아서 탈이랍니다. 한해가 또 이렇게 저물어 갑니다. 풍성한 결실을 거두시고 행복하시기를 빌겠습니다.
12/13 11:37
김상화
2019-12-04 23:46
올해가 저물어 가네요
벽에 걸린 퇴색된 카렌다는 1월에는 두 틈하고 예뻤는데
지금은 누렇게 변한 달력 한 장이 댕그란 히 걸려있습니다.
존경하는 박목철 작가님
올려주신 보자기의 글을 읽는 도중에 입가엔 향수의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쩜 국민학교 다닐 때의 추억어린 글을 그토록 생생하게 묘사했는지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못살고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그 추억만큼은 향기롭네요
잘 일고 갑니다
작가님 해가 지나기 전에 대포 한잔해야지요. ㅎ
언제쯤 시간을 잡는 것이 좋을까요.
곽종철 이사님과 함께 몇 사람이 모여 즐겼으면 합니다
박목철
김상화 작가님, 늘 반갑습니다. 한해가 또 이렇게 훌쩍 지나나 봅니다. 년말 행사에서 반갑게 뵙겠습니다. 말씀하신 소주 한잔은 꼭 해야지요, ㅎㅎ 평안하시고 좋은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12/13 11:39
박목철
위원장님 어디가 불편하신지요? 저도 최근에 탈장 수술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드니 여기저기 신호가 온답니다. 건강을 잘 추스르시기 바랍니다. 세월앞에는 장사 없다는 옛말을 실감하고 있답니다. 건강하세요 김상훈 위원장님,
12/13 11:42
김상훈
2019-12-09 01:51
꽃 이파리가 도랑물에 흘러가듯
수많은 기억의 행려를 남긴 채
일몰을 안고 저물어가는 서쪽 하늘처럼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늘 그랬듯
회한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나날
후회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도 좋다는 말에
무모하게 건넜던 詩의 강물들
아베르강을 생각하다
물살을 놓쳤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저는 글을 생각하다 시를 놓쳤던 같습니다.
己亥年의 한해도 서쪽하늘이 붉게 물들었습니다.
원로하신 작가님 앞에서야 감희 세월이 어쩌구저쩌구
하기도 민망 스럽지만 歲月이 流水 같다는 것은 어쩔수 없는 공감입니다.
한주 남은 년말 행사때 인ㅇ사 올릴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장선희
2019-12-23 16:10
박목철 작가님(감사님) 보자기의 소소한 이야기 공감하며 읽었네요
저도 어머니가 싸주시던 맛난 음식들을 보자기에 받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요즘은 봉투와 비닐봉지가 흔해서 창고에 쌓이고
저는 모아두었다가 재활용 하는데
너무 많아 동네 가게에 나누어준답니다
온난화 운동으로 마트 등 봉투사는 시행을 한다지만
봉투 값을 지불하는 건 너무 아깝게 생각이 듭니다
어릴 적 시절 아련한 기억을 상기 시켜 주신 내용
재밌게 읽고 갑니다.
庚子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작가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꿈이 이루어지시길 두 손 모아봅니다
또 건강과 행복이 함께하시고 가정의 평화기 길이 머물길 기원합니다
김종덕
2020-01-19 15:49
박목철 작가님 안녕하십니까? 교실의 조개탄 난로, 도시락, 보자기 책, 소똥 난로, 참 많은 것들이 지나갑니다. 하얀 옷 교복의 여학생, 검은 교복의 남학생, 그 대들이 지금 이나라를 건강하게 만든 사람들인데 또한 세대가 바뀌어 갑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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